타락한 ‘선생님’ 섭리사 막내리나
타락한 ‘선생님’ 섭리사 막내리나
창간28주년 특별기획•JMS
타락한 ‘선생님’ 섭리사 막내리나
자칭 구세주 정명석 우상화, 성추문으로 얼룩진 JMS 오욕의 20년
교주의 성추문과 사교적인 교단운영, 충남 금산읍 석막리(월명동) 일대의 성역화로 충격을 던져준 국제크리스챤연합(JMS). 새해 벽두의 탈출 여신도 납치 폭행사건으로 세상에 실체가 드러나게 되자 교주 정명석 씨는 해외로 도피해 버리고, 현재는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않은 상황에서과연 JMS가 개혁될지는 미지수다.
그동안 JMS는 교주의 성추문에만 국한돼 알려진 감이 없지 않다. 이에 정명석 씨의 신앙배경으로부터 JMS의 형성과정, 통일교와의 관계, 왜 젊은층이 JMS에 몰입하는지 핵심 간부 출신의 증언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성도들의 올바른 판단을돕고자 한다.
차제에 그동안 본지는 JMS 내부의 개혁세력이 교단을 바로 이끌어가겠다며 청년 대학생인 신도들의 장래를 우려해 일정 기간 지켜봐 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계속해서 JMS를 주시하고 있었으며, 항간에 떠도는 금품수수설은 “근거없는 음해”라는 ‘자인서’와 ‘사과문’을 JMS측 유포자로부터 받았음을 밝힌다. <편집자註>
Ⅰ. JMS와 통일교
국제크리스챤연합(이하 JMS) 총재 정명석 씨의 성추문에 대한 논란은 지난 84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나 그때마다 피해당사자의 신변안전과 프라이버시 보호등을 이유로 그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불씨를 안은 채 묻혀지곤 했었다. JMS 주변과 몇몇 이단 연구가들 사이에서만 떠돌던 정 씨 관련 성추문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년 만인 지난 3월 20일, SBS-TV 시사다큐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용기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방영되면서부터이다.
국제크리스챤연합(이하 JMS)으로서 치명적인 불명예를 감수하면서 정 씨와의성관계를 털어놓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정 씨의 성추문에 대한 의혹을 사실로받아들이게 하기에 충분했고 우리 사회를 경악과 분노로 몰아넣었다.
그러면 JMS는 소돔성과 같은 난잡한 섹스교단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정 씨자신은 여신도들을 유린해 성적 쾌락에 탐닉하면서도 신도들에게는 철저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젊은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교제마저 금했는데 이를 어길시 평신도는 7일, 지도자급은 21일의 금식기도 내지는 본부가있는 석막리(일명 월명동)에서 노역작업을 해야 하는 징계가 내려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정 씨의 행동과 통일교 교리에 가까운 이단성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명문대생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인정 씨에게 그토록 몰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JMS 초창기부터 최근까지 정 씨의 신임을 받으며 활동해온 측근 신도들의 증언을 통해 JMS의 태동으로부터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면 영육을 갉아먹는 사탄의 궤계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
지적이고 활기가 넘쳐보이는 JMS 청년 신도들의 모습에 비해 총재로 일컬어지는 정명석 씨의 투박한 외모와 어눌한 말투는 일반인의 눈으로는 도저히 어울릴것 같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TV 화면에 비춰진, 정 씨의 한 마디 한 동작에 귀기울이고 환호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집단무의식 상태에 빠진 광신도들의 그것과다를 바 없었다. 태어난 곳의 산허리를 깎아 자신의 왕국을 만드는 정 씨의 무모함과 딸같은 어린 여신도와의 성추문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가로젖게 하는데. 이렇듯 무모에 가까운 행동과 지탄이 되고 있는 성적 모티브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밝히기 위해서는 그의 신앙이력(?)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정 씨는 1945년, 지금의 JMS 본부가 있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에서 부친정팔성 씨의(97년 사망) 6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빠듯한 살림을 꾸려나갔던 정 씨의 부모는 정 씨 위로 두 형은 대전의 고등학교를 보내 공부를 시켰으나정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정규교육을 마쳤다고 그의 맏형인 정인석목사(59. 하남중앙성결교회 담임. ‘전 국제크리스챤연합 교단갱신추진위원회’ 위원장)는 밝히고 있다.
정 씨의 집안이 신앙을 갖게된 동기에 대해서는 JMS 산하 단체인 세계청년대학생MS연맹에서 95년 발간한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정 씨는 6세 때 하나님을 찾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초상집에서 시체를 염하고매장하는 것을 보고 인생의 허무를 깨달았으며, 13세 때 동네에서 춘향놀이라는초자연적인 미신행위에 능통한 한 청년이 놀이를 주도하며 춤을 추다 “말세가 왔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어라!”라고 하여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예장 통합측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책에는 당시 춤을 춘 청년이 누구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이 청년이 바로 자신이라고 정인석 목사가 밝힌 바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 씨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한을 신앙생활에 쏟기라도 하듯 성경과 산기도에 매달리다시피하는 등 나이답지 않게 아주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정 씨는 22세가 되던 66년 입대하여 2차례의 월남 참전 후 69년 9월 전역했다. 그후 잠시 고향에 머물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당시 성결교단의 선교회 총무로 있던정인석 목사에게 취직을 부탁하러 갔다가 성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JMS의‘4대론’과 ‘공중 휴거론’은 이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교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정 씨는 이내 고향으로 내려와 노방전도를 하면서 전국을 일주하기도 하고 고향 인근에 있는 대둔산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관광객들에게 쪽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 씨는 이 시기에 나운몽장로의 용문산 기도원과 삼각산 기도원 등을 전전하기도 했는데 남한산성에서70일 기도를 통해 영계를 깨달았다고 주장했다.
정 씨는 통일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데, 정 씨가 통일교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75년부터이다. 후에 정 씨는 예수님이 통일교를 정탐하라 명하였다고 자신이 통일교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설명했는데 “그때까지 문선명을 한 번도본 적 없고 누구인지도 몰랐으며, 교회에 가니 문선명의 사진이 걸려있어 누구냐하니 우리 선생이라고 그곳 전도사가 설명하는데 예수님의 사진도 없고 십자가도 없어서 이건 예수를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고 했다가 그곳 사람들과 다퉜다”고도 말했다.
문선명에 대해서도 정 씨는 79년도에 문 교주가 국내에 들어와 가진 중직자들(정씨는 중직자라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교회장은 목사를 칭하고 중직자는 그 위 간부를 말함)수련회에 누군가의 소개로 참석함으로써 처음으로 문선명의 설교를들었다고 신도들에게 말해왔다. 그러나 그같은 말은 정 씨 자신이 통일교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말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한 신도는 정 씨가 통일교에들어간 계기는 다른 데 있다며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정 씨가 노방전도에 열심이었을 때 우연히 금산읍의 한 양장점에 들어가 하○숙이라는 통일교 여신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정 씨가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하자 하씨와 언니는 “우리 교회에 훌륭한 선생님이 계신데 말씀 한 번 들어보시면 좋을것”이라고 권유했는데 통일교에는 관심이 없고 하 씨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정 씨는 그 집에 무시로 드나들면서 힘든 일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통일교 반공강사 정명석
통일교 신자인 하 씨 자매는 통일교식으로 정 씨를 결혼(합동결혼식)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통일교를 믿을 것을 권유하였고, 정 씨는 정 씨대로 하 씨를 통일교로부터 뺏어와야 된다는 생각으로 하 씨에게 예수를 믿게 할려고 애를 쓰던 중 정씨는 하 씨의 소개로 통일교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몇십 년 전에다 깨달아서 말씀을 전달하였다”는 통일교 전도사의 얘기에 충격을 받은 정 씨는문선명 교주와 통일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금산 통일교에 입교했는데 이후 통일교의 승공연합에서 반공강사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통일교는 승공활동이라 하여 반공강사를 많이 활용하였는데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을 통일교에서 십분 이용한 정 씨는 하 씨와 결혼할 생각으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려면 문 교주의 축복식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정 씨가 ‘장로교 집안에서 통일교에 빠졌다’며 힐난을 당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통일교 교역자와 하 씨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통일교에서는 74~75년 사이에 교역자들의 이성문제가 특히 심각했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통일교는 60년대에 대거 결혼을 시켜서 이후에는 교역자와 교인들간의 성추문이 없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통일교 기관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 씨와 문제를 일으켰던 전도사는 통일교에서 쫓겨나고 여자는 다른 곳으로 시집감으로써 정 씨의 하 씨에 대한 희망은 깨졌다. 이 때의 상처와 통일교에서 주입된 교리가 정 씨의 비상식적인 여성관을 형성했을 것이라는 게 증언을 해준 신도의 추측이다.
어쨌든 정 씨와 통일교와의 관계는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통일교와 관계를 맺고 있던 75년부터 78년까지의 3년간 정 씨가 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유추해낼 수 있다.
한편으로 정 씨는 측근 신도들에게 75년도에 문선명의 사명은 끝났고 78년부터자신의 사명이 시작됐다고 공언했다고 또다른 JMS 신도는 말한다.
“JMS의 30개론이 통일교리와 유사하다는 것은 JMS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먼저 타락론을 살펴볼 때 통일교나 정 씨는 인간의타락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성적인 타락으로 보고 있다. 정 씨는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이 성적 타락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 때 통일교에이미 자신의 생각과 동일한 타락론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통일교가 타락론을 가지고 60~70년대를 휩쓰는 것을 보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구나’라고 생각한 정 씨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 JMS 타락론의 문제점이다.”
이 신도는 계속해서 JMS 교리 중 통일교리에서 유입된 중요부분을 다음과 같이설명한다.
“82년도에 애천교회에 처음 갔을 때 누가복음 12장 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구절이 교회 표어처럼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정 씨는 항상 불에 대한 개념을 많이 얘기했다. 그런데 그것은 통일교 말세론의 중점이 된다. 84년도까지는 관심있는 사람들은 <원리강론>을 한 번씩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공부하다보면 수수관계, 수수작용 탕감 등 통일교리와 비슷한 용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JMS 교리의 통일교리와의 유사성과 정 씨의 성경해석의 오류는 재림론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이 신도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재림론 중 구름의 개념을 정 씨는 잘 깨닫지 못했다. 통일교와 논리가 너무 비슷하고 인용하는 성경구절도 똑같다. 통일교와 JMS는 공히 구름을 사람으로 해석했다. 통일교는 히브리서 12장 1절의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이있으니”를 인용하고 JMS는 다니엘서 7장 13절의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를 인용하고 있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다니엘서의 구름이 갑자기 통일교에서는 현실적인 구름으로 치환된다.
하나는 다니엘이 환상과 이상 속에서 본 구름이고 히브리 기자가 얘기한 것은 문학적 표현인데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성경이 완전히 증빙을 못하지만) 정 씨가 재림론에 대해서는 잘못 깨달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Ⅱ. JMS 전신 애천교회와 ‘신촌 5형제’
78년에 나름대로 자기가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한 정 씨가 교회의 형태를 가지고세상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80년 2월 서울 남가좌동에 애천교회를 개척하면서부터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로는 김○남, 송○남 등 전도사 2명이 있었으며 정 씨는 집사였다. 그는 주로 영계를 봐주며 기도하고 환상을 봐주는 역할만 했지 설교는 안했다고 한다.
2명의 전도사 외에 몇 명이 더 있었으나 JMS 1호라고 할 수 있는 첫 신도는 지금도 JMS 목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희 씨이다.
정확히 80년 8월 15일, 정 씨는 SBF 신촌학사 출신인 김 씨를 전도하고 김 씨가9월 8일 조직적 체계를 갖춘 오늘의 JMS를 완성시킨, SBF 관악학사 출신인 안구현 씨를 전도한데 이어 안 씨가 지금의 섭리신학원장인, SBF 신촌학사 출신인 김형만 씨를 전도함으로써 JMS는 본격적인 성장체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김○희 씨, 안구현 씨, 김형만 씨 이들 3인을 빼놓고는 JMS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이들의 역할과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안 씨와 김 씨 모두 당시 최고 명문 대학원에 재학중인 수재들로서 SBF 내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SBF는 UBF에서 독립한 단체로서 평신도 선교회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안 씨는 평신도 선교회 목자생활을 하려했고 세계선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SBF나 UBF가 지향하는 것이 ‘성서한국선교회’였듯이 그 전통을 김○희 씨나 김형만 씨와 같이 공유하고 있었는데 묘하게 정씨와 접하게 된 것같다. 이들 세 사람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JMS가 지금과 같이젊은이들이 모이는 단체로 성장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선배격인 3인을 평가하는 초창기 신도는 이들과 정 씨와의 관계를 알아야만 JMS의 성장과정을 알 수 있다며 이들 3인의 신상을 자신이 아는대로 설명했다.
모여든 젊은 동지들
안 씨는 고등학교 때 전국 대표로 독일을 견학할 정도로 독일어가 유창했는데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독일에 유학가서 신학공부를 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SBF 활동을 하면서 후배들 빨래도 하고 밥도 해먹이는 등 섬기는 훈련을 하던 안씨는 정 씨를 만나면서 신앙생활이 확 바뀌게 되었다.
당시 SBF에서 유망주였던 안 씨를 겨냥해 김○희 씨가 “저 사람만 잡으면 한국 기독청년은 이제 끝장이다”라고 정 씨에게 바람을 넣었고, 정 씨는 곧 안 씨를 만나“내가 산에서 수도생활을 많이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깨달았는데 학생이유망한 학생이라고 해서 왔다. 내가 하는 말을 이제부터 믿을 생각이 있으면 말씀을 전하고 믿지 않으려면 여기서 그냥 헤어지자”고 자신의 뜻을 전했다. 훗날 안씨의 표현대로 ‘3일만에 정 씨의 사명을 알아’본 안 씨는 정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이후로 정 씨에게 닥쳐오는 내부로부터의 엄청난 도전을 안 씨가 다 물리쳐준 것은 물론이다.
“안 목사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에 비해 정 씨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정 씨에게 이론적인 배경이 있었겠는가, 모든 것을 안 목사가 이론적으로정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랫사람들은 자연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같은 사람은 안 목사를 선배로서 정말 존경했다. 나도 꿈많은 지방 촌놈이 뭣하러 이단이라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이 단체에서 내 젊음을 불 살랐겠는가.”
설명을 하면서 이 신도는 안 씨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김○희 씨는 어렸을때부터 영에 시달린 사람이라고 알려진다. 단정하고 총기도 있고 누구보다 정 씨의 주장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많이 암송하고 있었고 가장많이 삶에 적용하며 청교도적인 생활을 할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자신이 정 씨를 처음 알아보고 그를 전하였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김형만 씨는 명문대 법학 박사로서 뉴욕대에서 수학한 이력의 소유자로 자신의주장을 굽힐 줄 모르는, 고지식하고 심지가 굳은 학자타입이라고 한다.
이렇듯 내로라하는 배경을 가진 세 사람과 정 씨의 만남이 정 씨에게 힘찬 날개와화려한 의복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남가좌동 애천교회는 이들 세 사람이 가세하며 차츰 틀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이들 세사람보다 먼저 와 있던 두 사람의 전도사와 몇 명의 신도는 성향이 통일교신자들과 흡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형만 씨는 당시 통일교에서는 개척교회를 기성교회화하기 위하여 통일교에 근본 줄기가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있게 하고, 일반 신학교에서 온 사람들은 흡수하기보다 교회를 개척하게 하려고 전략적으로 많이 내보냈는데 그들도 그런 부류가 아닌가 생각했었다고 말한다.
80년 11월, 애천교회는 서울 삼선교의 성향원이라는 허름한 부랑자시설의 2층모자원 건물을 아는 사람을 통해서 사용하게 되었고 공식적인 전도활동에 들어갔다. 초창기에는 주로 SBF 회원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박○휴(87년 탈퇴) 씨가김○천(현 JMS 목사) 씨를 전도하는 등 뭔가 색다른 분위기에 취한 신도들은 전도에 적극성을 보여 학생들이 30여 명으로 불어났다.
통일교 후발주자
김형만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81년에는 통일교에서 학생들을 모집해서 일본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큰 특권이었다. 이때 만난 사람이 한빛선교회의 장수진(『현대종교』 97년 10•11월호 보도)이다. 일본에 갔다오고 나서 우리는 엄청고무되었다. 전자가 저 정도이니 후자인 우리는 엄청나게 크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당시에는 우리가 통일교 분파라는 인식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통일교가 메시아구나 굳게 믿고 있었다. 세상에서 저렇게 이단취급하는 것을 선생(정명석)이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진짜다싶고, 나도 통일교 후자라고 믿었다.”
신도들에게 통일교리를 거의 다 전달한 정 씨는 스스로도 통일교에 대한 미련이강하게 남아 있었는지 “내가 통일교로 갈 것인가, 기독교로 갈 것인가.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의 뜻이다. 통일교에서도 나를 원한다. 기독교로 가는 것도 가나안 복귀다. 기독교도 나를 원했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당시 통일교의 위세는 대단했다. 통일교에 젊은이들이 많았고, 미국에서 한국인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많은 히피들이 동양의 한 사람(문선명)에게 굽신거리는 모습 등 통일교는 우리에게 모델이 되었다. 우리도 잘하면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기대와, 99년에 모스크바 하늘에 복음의 깃대를 꽂고 나간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당시 통일교에서 대학교 선교단체로 위장한ICSA(International Cristian Student Association)라는 단체를 만들려고 할 때JMS를 주축으로 하려 했으나 청평에 있는 수양관에서 정 씨가 관여된 단체라는것이 들통나서 틀어졌다. 재정적인 지원이 통일교에서 되니까 그것만 가지고서도 학생운동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학교도 그만둘려고 했었는데 들통난 것이었다.”
김 씨는 교리적인 내용보다는 무언가 하나님을 향해 기존의 부패함을 제치고 할수 있다는 신앙심과 열정으로 신도들이 뭉쳤었다고 말한다.
이후 많은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틀이 잡히고 부모들도 전도되는 등 성장을 거듭하던 애천교회는 소설가 김모 씨를 전도하게 되었다. 애천교회에 그야말로 날개를 달아 준 것이나 다름없는 김 씨는 82년 1월 명보극장에서 만든 ‘태맨’이라는 소극장을 친구에게 얘기해서 선교회에 빌려준 일도 있는데 당시 ‘태맨’을 운영하는사람도 이들 젊은이의 모임을 ‘작은예수들의 모임’이라고 칭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JMS 초기의 성(性)문제
JMS가 외부에 알려지게 되는 것은 신도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을 알려는 뜨거운열정이나 정 씨가 해석하는 말씀의 진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 씨와 여신도간의성추문이 있을 때였다. 사실 이러한 성추문은 JMS의 출발부터 계속되어왔다.
JMS가 처음 남가좌동에 애천교회라는 이름으로 둥지를 틀었을 당시 통일교 성향을 가진 김○남, 송○남이라는 두 명의 남전도사와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앞서언급한 바 있다. 송 전도사는 정 씨의 주례로 이○자라는 여신도와 결혼했는데 정씨는 두 전도사를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같다고 김형만 씨는 말한다.
그런데 이○애라는 여신도가 애천교회에서 밥도 해주고 환상도 봐주고 했는데 정씨가 남편이나 되는 것처럼 얘기했다고 한다. 정 씨에게 물어보면 “내가 하는 얘기 외에는 그 여자가 하는 얘기는 다 거짓말이니까 믿지 말라. 남자문제도 있고,다른데 가서 임신해가지고 와서 나한테 다 뒤집어 씌울려고 한다”고 대답했는데,이 여인은 계속 정 씨와 다투다가 다음해 9월에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송 전도사도 정 씨에 대해 “자기만 위하고 여자문제도 있다”고 자주 불평을 토로하였는데,당시 교회에 드나들던 학생들은 정 씨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으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81년 초에도 새 신도가 정 씨가 자기를 “범했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사로알았고, 오히려 정 씨가 요셉처럼 거부를 하니까 욕구가 반감으로 작용한 것이라생각했었다”고 김형만 씨는 말하는데 이 문제와 더불어 “선생님이 결혼을 했다더라”, “시골에 숨겨논 아들이 있다고 하더라”, “말씀은 통일교 등의 말씀을 짜깁기를 한 것이다”라는 말이 떠돌아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특히 여자들은 다 나가고 김○희 씨 혼자만 남게 되었는데 당시 정 씨를 따르던 사람들이 정 씨가 자신들을 시험했다는 것으로 상황을 합리화시킨 일화는 신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정 씨는 계속되는 성추문에 대해 “나는 솔직히 말해서 결혼을 했다. 이 말씀은 내가 다 배운 것이다. 너희들에게 속여서 미안하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라고 해명를 했다. 그때 안구현 씨가 모든 것이 모사이겠지만 정 씨에게 인간적인 문제점이있다고 쳐도 가르쳐준 말씀은 자신이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라며 정 씨를 안아버렸다. 즉 안 씨에게는 정 씨의 사생활에 관계되는 것은 관심이 없었으며이러한 생각은 이른바 ‘신촌 5형제’라고 일컬어지는 초창기 멤버 모두 공유하고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측근들의 맹목적인 믿음에도 불구하고 정 씨의 이성문제에 대한 좋지않은 추문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태맨’을 소개해준 소설가 김모 씨의 처제 백○○ 씨가 자신이 영적으로 성령이라고 주장하며 정 씨와 결혼해야 한다고 나선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정 씨의 이성문제가 거론되어 김 씨를 비롯한 김 씨 가족이 모두 교회를 나갔으며, 84년도 『현대종교』 9월호와 『CCC편지』에 정 씨의 성추문에 관한 기사가 게재되어 여자문제가 처음으로 외부에 노출되었다. 이후로도 『영레이디』87년 5월호에 정 씨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진 바 있다.
정 씨의 한 측근은 그때 제대로 조사가 되었더라면 정 씨가 바로 서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피해자 신변보호를 이유로 사건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오히려 정 씨가 자신감을 얻고 자신의 행각을 정당화하게 됐다고 안타까워 했다. 즉정 씨 자신이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었는데도 별다른 사법적 조치를 받지 않게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둔산 일대의 성지화 작업에 들어갔고 정상 암벽에‘정명석’의 영문 이니셜인 J자를 새기는 등 유아독존적이고도 폐쇄적인 교단운영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Ⅲ. 왜 젊은 청년들인가
“섭리사(JMS의 역사)에는 뭔가 영적인 것이 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논리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독특한 것이 있다. 정 총재의 매력을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은말에 있다 ‘우리나라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끝이 안좋았다. 나도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는데 잘못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혹시 실망을 주더라도 이 말씀을 진리로 믿으라. 만약 이 말씀이 너를 못믿게 하더라도 이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다’라는 정 총재의 말에 나는 무릎을치며 이 사람은 내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힘없고 배우지 못하고연약한 사람을 들어서 쓰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저렇게 얘기할 정도라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을 느꼈다.”
JMS 초창기부터 정 씨를 신봉했지만 지금은 정 씨의 부도덕한 일면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김모 씨는 자신은 물론 젊은이들이 정 씨에게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같이 말한다.
김 씨는 초창기의 JMS는 “너무 재미있었다”고 한다. 몇 사람 안되는 가운데서 모두가 다 형제, 자매, 동지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지 도우려 했고 서로간에 아까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80년 초에 30여 명이었던 신도가 82년 6월에 70여 명으로 늘어나고 82년 말이 되자 210명으로 늘어나는 등 놀랄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당초 JMS는 정 씨가 교회를 맡고 안구현 씨는 선교회를 맡는 식의 이원화 구도를구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86년에 애천교회가 영동으로 이전하면서 백지화되었다.
80년대 초반의 암울한 사회 상황 때문인지 JMS에 전도되어온 사람들은 새로운선교회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차 있었고 그것은 성장이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신앙생활에서 느껴보지 못한 영적인 체험(?)과 교류가 젊은이들이 몰입하게 된 요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도대체 JMS가 말하는 영적인 체험과 교감이 무엇이길래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정 씨와 젊은이들이 의기투합하게 된 것일까.
영적 체험(?)에 미혹된 젊은이들
“정 씨를 처음 보았을 때는 아니라고 보았다. 이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말씀을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 씨에게서 예수님의 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 씨를 단 한번도 보지않았는데 그때는 지금과 같지않게 눈초리가 매서웠고 범상치 않은 기운과 함께 총기까지 느껴졌다. 내가 죄인이라면 감히 두 눈을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시 나 자신도 별로 죄를 많이 안지었기에 위축됨은 없었으나 아무튼 총기가 흐르고 안광이 혁혁했다. 내가 느낄 정도로 정씨가 영력이 있었다.”
김 씨는 정 씨를 처음 보았을 때 무언가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처음 갔을 때는 영적 분위기였다. 환상 방언 등을 하고 영이 보이기 시작하고 천사가 보이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교회에서 모여서 기도를 하는데 영안이 열리는것이……. 그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김 씨는 당시에는 철야기도를 많이했으며 그 와중에 신유의 은사도 있었고 영안도 열렸으며 그래서 더욱 기도에 힘썼다고 한다.
평신도로서 성경을 제대로 알고 싶었던 김 씨는 기도도 남못지 않게 하였지만 방언과 환상은 체험하지 못했는데 JMS에서의 영적 체험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영동교회 시절 하나님께 한 번 혼났는데 기도를 하다가 정 씨가 굉장히 화를 낸적이 있었다. 순간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500여 명이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이 회개 안할 수 없었다. 모두가 철야를 하였다. 정 씨가 ‘죄를 다 고백하라’ 해서 밤을 꼬박 세워 기도한 적이 있다”고 당시를 회상하는 김 씨의 말은 JMS에서의 소위 영적인 체험 때문에 젊은이들이 몰입하게 된다는 것을암시한다.
젊은이들의 영적인 미숙함을 정 씨에 대한 우상화에 이용하게 된 것은 82년 말 신모 씨가 언니와 함께 전도되면서부터이다.
당시 18세의 신 씨는 고교졸업 후 미술대학에 가기 위해 진학준비를 하고 있었다.신심은 그리 깊지 않았으나 측근들의 말대로라면 상당히 영안이 열려있었다고한다. 미술공부를 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색감각을 가진 신 씨에게 정 씨는 자신의 영계론을 한껏 주입시켰다. 신 씨가 기도를 하면서 하늘나라 색을 정 씨에게말하면 정 씨가 해석하는 식으로 자신이 73년부터 74년까지 2년간 영계를 보고왔기 때문에 분별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정 씨는 영계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영계에가면 헛갈려 총천연색으로 보인다면서 자신이 지시하는 색깔로 따라가라고 하는데 그러면 신 씨가 영적으로 받아서 확인하는 것이다. 정 씨가 과거에 가서 보았다는 것과 지금 보는 것을 맞추어 보았던 셈이다.
김 씨는 “영계는 색깔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색과 천사의 색, 흑암의 색,악령의 색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의의 옷이라 해서 옷색으로 구분한다”며 이러한 행위의 의미를 설명한다. 따라서 신 씨는 정 씨의 증거자가 되었던 것이다.
정 씨는 이러한 쇼같은 행위로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의 흥미를 이끌어내 자신의주장을 주입시키고 몰두시켰다.
신 씨가 처음부터 영계의 색을 맞춘 것은 아니었는지 4~5년간 정 씨로부터 수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의 색깔맞추기는 88년부터 90년까지 절정을 이루는데 이시기를 JMS에서는 ‘영의 역사’라고 말한다. 또한 이 시기는 교회가 낙성대로 옮겨성장일로를 달리던 때였는데 이때부터 ‘공개방송’이라는 집회를 시작하였다.
“영계를 봐준다고 해서 신 씨가 신도들의 신앙상태를 봐주는데 대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씨는 특정개인을 대상으로는 보지 못하게 했다. 기운이 강한 개인이 암암리에 다른 사람의 영계를 보아준 적이 있으나 정 씨의 지시로 영계는 신 씨 외에는 못보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신 씨의 위상은 대단했다.”
당시 상황을 말하는 김 씨에 따르면 90년 이후 영의 역사가 무너졌다고 한다. 신씨가 결혼 문제로 영의 기준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는데, 정 씨가 평소 신 씨 정도면 결혼하겠다는 말을 측근들에게 자주했던 것을 곧이 들은 신 씨가 정 씨와 결혼하고 싶어었지만 정 씨가 결혼하지 않는다고 공표했기에 낙담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관계는 깨지고 이후로는 색깔맞추기 같은 쇼가 없어졌음은 물론이다.
JMS식 축복결혼
JMS는 90년까지 공식적으로 신도들의 결혼을 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 하나결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한다. 신도들은 “총재가 결혼을 안했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 “사도 바울의 말도 있잖느냐”라는 둥의 이유를 대지만 그 이면에는 통일교적인 사상이 깔려 있다.
“타락론을 배울 때 문선명 씨의 타락론에 대해서는 아주 안좋게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배울 때는 타락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성의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받아들였다. 조금은 청교도적인 그런 교육을 받았다.”
김 씨의 말에서 알 수 있듯 JMS는 어떠한 이성교제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오히려 이성에 대한 욕구를 정 씨에게 향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혼이 금기시되던 JMS에 물꼬가 트인 것은 90년 1월 부총재였던 안구현 씨가결혼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도 결혼한 사람들이 4쌍 정도 있었으나 JMS내의공식적인 결혼은 안 씨가 처음이다.
안 씨는 언론에 JMS 내 여자문제가 오르내리자 젊은 남녀가 있으면 이성문제가일어나는 것을 인식하고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성관계가 있던 사람은 일단 제외하고 ‘순결한’ 사람부터 결혼을 했다. 안 씨 이후 김형만, 김○천 씨가 차례로 결혼했으며 92년도에 100쌍의 합동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로인해서 지도자층이 많이 빠져 나갔고 JMS에게는 결혼허용이 마이너스 요인이되었다. 그 이유를 김 씨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너무 오래 있다 하니까, 10년 이상 진을 다 빼놓고 결혼하다보니 이혼하는 사례가 생겼다. 정책의 실수였다. 결혼을 애초부터 차근차근 실행해서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했는데 전체가 결혼 안한다는 식으로 하다가 급변해버리니까 목표의 지향점을 잃어버리는 혼란이 왔다.”
그때부터 JMS에는 결혼할려고 하는 사람과 안할려고 하는 사람, 정 씨가 “결혼하지 말라”고 한 부류 등 3부류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남자의 90%는 결혼을 찬성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대부분 안하려고 한다고 한다. 여신도들이 결혼을 안하려고하는 것은 정 씨가 ‘하지 말라’고 한 부류에 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고 싶어도 신도들의 남녀 성비율이 맞지 않아서 어차피 못하기 때문이다(JMS 신도는 외부인과 결혼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전에는 성비가 남자 2에 여자 3이었는데 점점격차가 벌어져 근래에는 남자 1에 여자 2 정도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싹트는 내부분열
초창기 JMS의 지도자들은 일반 평신도 선교를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목회자 중심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오늘의 사태가 야기되었다고 김 씨는 말한다.
“초창기에는 제자공동체를 추구했으며 서로를 위해 주었다. 당시 정 씨는 약한 사람이었고 제자들이 파워가 있었다. 정 씨를 축으로 신 씨의 경우처럼 영계의 상황을 전해주면 우리가 정립해주는 역할을 했었는데 정 씨는 그것을 다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라며 정 씨의 과욕을 지적하는 김 씨는 JMS 내에 정 씨의 위상이 확립되고 그가 86년 예수교대한감리회 진리측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방향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정 씨에 의해 JMS의 방향이 선회하고 그의 여성문제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결정적으로 조직의 핵심인 안구현 부총재와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계를 느낀 안씨는 89년에 독일로 유학을 갔으나 부친이 위독해지자 귀국했는데, 안 씨가 독일유학을 마쳤으면 판도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김 씨는 아쉬워하였다.
정 씨와 안 씨 사이에 한 번 벌어진 틈은 계속해서 벌어졌는데, 정 씨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하여 대둔산에 자신의 영문 이니셜인 ‘J’를 새긴 사건으로 인해또다시 안 씨와 트러블이 일어났고 91년 여름에 안 씨가 영국으로 유학가자 정 씨는 한 곳이었던 서울의 교회를 4군데로 분산시켰다. 이에 안 씨는 반대했지만 밑의 목회자들은 환영하였다고 한다. 당시 낙성대교회의 임대계약기간이 만료되어안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정 씨가 안 씨를 견제하기 위해서 교회를쪼갠 것으로 안 씨 측근들은 보고 있었다.
月明洞的 JMS王國
계속 불거지는 정 씨의 여자문제와 교단내 불법모금운동 등으로 불신의 골이 깊어가던 가운데 안 씨는 94년도에 부총재 자리를 내놓았고, 정 씨는 고향인 석막리에 세운 성전(월명동)으로 본부를 옮겨갔다.
이때 교단의 모든 자료와 서류를 가져감으로써 안 씨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JMS는 깊은 산속에 아방궁을 틀어내림으로써 더욱 폐쇄적인 1인 왕국이되어버렸다.
당초 정 씨가 자신의 기도처와 생가를 소개하면서 알려졌는데 신도들 사이에 기도하기 좋은 곳으로 인식되자 초창기 멤버인 김○○ 씨가 남자 신도들을 위한 기도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제의해 89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95년에 완성되어졌다.
“여자가 너무 드세다고 느낄 정도로 남자 교역자들은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월명동에 한 번 가보고 기도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곳에 공사를 하고 가시적인 것을 할려고 하다보니 실족하고, 또한 여자들이 정 씨를 응원해주러 가다보니 정 씨는 더욱 도취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맛들인 정 씨가 월명동에 둥지를 틀고 3년이 지나다보니 부도덕한 생활이 고착화된 것같다”는 김 씨는 월명동 개발의 처음 취지가 무너진 게 오늘의 사태를 몰고왔다고 아쉬워하였다.
한편에서는 JMS의 오늘과 같은 사태가 안 씨를 견제하려고 정 씨가 자신의 동생들을 주요 자리에 포진시키면서 야기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월명동에서는 정 씨 외에 3명의 동생들이 JMS 내부의 주요 일을 하고 있었는데그 중 정 씨의 바로 아래 동생인 정범석(50) 씨의 위치가 격상되면서 안 씨와 알력이 심했다고 한다. 한동안은 서로 형에 대한, 선생에 대한 배려로 의기투합해 두사람이 아주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정 씨에 대해 궁금해하던 사람들이 그의 동생에게 하나 둘 모여들면서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이 구축되었다. 93년에는 둘째 동생이 정 씨의 비서로 들어오면서 안 씨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94년까지 안 씨가 갖고 있던 결재권이 이후에는 전부 정 씨 가족에게 넘어갔다. 재정은 정 씨가 가족에게 안맡겼지만 정범석씨가 추천한 사람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 씨의 맏형이자 현재 교단갱신추진위원장인 정인석 목사는 정 씨의성격이 워낙 괴팍하고 그의 허락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넷째 동생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점은 정 씨 일가와 친한 안 씨 측근의 사람들도 정 씨 동생들의 성품이나 능력으로 보아 그럴 사람들이 못되며 모두 정 씨의독선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말해 일치를 이룬다.
안 씨는 많은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굳이 인사권이나 재정권이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리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정 총재를 모시는 입장이다 보니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경우를 찾다보니 실기를 하였고, 총재 동생인정범석 목사에게 월명동 만큼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형제들이 알아서 할 것을당부하자 정 목사도 이에 혼쾌히 응했다”고 말하는 안 씨의 측근은 안 씨가 지난해 미국으로 유학간 것도 이같은 잡음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성결교단 목회자인 정인석 목사는 82년에 처음 JMS 사람들을 보고 ‘신학도 안한사람들이 무엇하는 짓이냐”며 호통을 치고 발을 끊었다고 한다. 그러다 월명동을개발하면서 접촉이 잦아졌는데 정 목사는 “멀쩡한 산을 훼손한다”고 나무라기도했으며 안 씨를 비롯한 정 씨 측근들에게 단체를 해산할 것을 종용하였다. 정 목사 생각에는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무식한 자신의 동생을 꼬드겨 이단 소리 듣게 만든 것이 상당히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도 정 씨 측근들은 형님들에게 깍듯한 정 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정 목사를 다르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정 총재는 종교통일을 꿈꿔왔던 것같다. 그는 큰형이 성결교 목회자이며 교단 업무를 오랫동안 하는 등 기성교회에서 많은 활동을해 조직력을 갖추고 있기에 교단일을 맡길려고 했었고, 작은형은 통합측 목회자이면서 미국의 신학교를 나왔기에 신학교를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늘 비추었고 두 형에게 항상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였다”는 정 씨의 한 측근에따르면 이전에는 이단시비로 인하여 형제간에 소원하였으나 정 씨가 부친을 모시면서 왕래가 잦아졌고 지난 97년 11월에 부친이 사망한 후부터는 두 형과 우의가 더욱 돈독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황 양’ 납치폭행 사건과 지난 3월 20일의 SBS방송으로 인해 정 씨가외국으로 도피하는데까지 사태가 악하되자 정인석 목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말을안들은 동생과 안 씨가 원망스러웠을 것이고, 안 씨는 안 씨대로 정 씨 형제들의10년간의 무지한 운영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라고 JMS 주변에서는 보고 있다.
Ⅳ. 누구를 위한 JMS 개혁인가
지난 달 24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정 씨에게 유린 당했다며억울함을 호소하는 피해 여신도들의 증언과 자칭 구세주라는 정 씨가 인터뷰를피해 황급히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사실 보도에도 불구하고 방송국의 조작이라며 항의하는 신도들의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비쳐졌다.
정 씨가 행여나 JMS 초창기 자신과 관련된 성추문들을 모사라 하여 순진한 신도들을 속인 것이 통했던 기억을 되살려 이번에도 요행을 바란다면 크나큰 오산일것이다.
“초창기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는데 어느날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으며 최근에도 주님 이름으로 한다. 나는 ‘말씀’을 관장했던 사람으로서 민감하다. 내가 총재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신앙고백의 문제가 생긴다.”
한때 정 씨의 최측근에서 신임을 받았던 초창기 멤버 중의 한 사람인 또다른 김모씨는 초창기와 다르게 변질되어버린 정 씨의 신앙고백에 실망했다며 정 씨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초창기부터 “세상의 모든 명예를 버리고 제자되기를 원하”며 20여 년 가까이 JMS에 몸담아온 그는 정 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들어본다
정명석 씨를 메시아로 본다는데 사실인가?
정 총재를 메시아적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대체할 수는 없다. 문선명이든 정 총재든 개념이 다르다. 이들 두 사람이 어떤 근거로 성약의 주인이라고 하는지 모르나, 주님 앞에 두 감람나무라면 주님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어릴 적부터 예수님이라고 배웠고 정 총재는 단지 예레미야처럼 선지자로 보았을 뿐이다.
그를 선지자로 보는 이유는?
종교분야에 많은 부패구조가 있고 무언가 개혁이 안되었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학력을 가진 사람들을 들어서 배운 사람들을 깨닫게 한다고 보았고, 우리는 배운사람으로서 거기에 동의한 것 뿐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계시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도 계시를 받았다고 뛰쳐나간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와 초창기 사람들은 계시파가 아니다. 물론 계시를 받은 적도 없다.
그럼 옛날에는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는가?
옛날에는 많았다. 지금은 없지만 85년 이전까지는 계시파가 있었다.
주로 어떤 논리인가?
문선명과 정 총재, 계시받았다는 사람의 논리로 이어진다. 박태선과 조희성, 이천성의 논리처럼. 역사론 자체가 그렇게 가르쳤다. 한 10여 명 계시파가 있었고 물의도 빚었다. 두 감람나무가 오면 이긴 자가 온다는 논리로, 왜 이긴 자가 없냐며자신이 이긴 자라는 주장과 함께 통일교식 사상을 물려받은 이들이다.
본인은 통일교식 사상에 물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교리에 통일교 색채가 짙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점은 우리의 근본은 언제나 예수님이다.
그럼 교리에 이단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인데, 바로 잡을 생각은 없었는가?
우리는 빨리 검증받기를 원했고 정 총재는 길게 본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할 수도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으니 재촉하지 말라”는 식이었다. 정 총재는 3할대만 치면잘 치는 것 아니냐, 말도 실수할 수 있다며 그냥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배운 것을 빨리 검증받음으로써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싶었고 얼마든지 바르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보는 하나의 시각을 따랐고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일반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었을 리도 없고 다른 책을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책을 열심히 보고 세상의 지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성경교리들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여기에만 답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JMS의 모든 행사나 성경 해석이 정 씨 우상화에 초점을 맞추어 왔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 총재 한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은 이제 없애야 한다. 정 총재를 메시아적존재로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고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죽지않고 살아있지만 이제는 지도자로서는 정 총재를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영의 역사이기 때문에 부활세계까지 21년을 더하는 것은 동의를 구해야 한다. 동의를 구하는 것은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 총재가 시인하지 않고 내가 누구라고만 한다면 인정 못한다.
•지금 정명석 씨에 대한 생각은?
나는 그가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이제라도 눈물로 회개하고 빨리 귀국하여 성추문을 비롯해 자신이 저지른 모든 문제에 대한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한다고 본다. 단언하건데 정 총재의 시대는 끝났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한다고보기 때문이다. 오래 참고 기다리다가 결국 그 문제를 터뜨렸다고 본다. 하나님의심판이었기에 인간이 막을려고 노력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스승으로서 예수님을 가르쳐준 유일한 사람인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단 나의 신앙에 있어 교리에 문제가 있다면 고칠 의향은 얼마든지 있다.
•향후 JMS가 추구해야할 방향이라면?
78년부터 99년까지가 정명석의 시대라는 것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좋은과거든 아픈 과거든 과거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젊다. 잘못된 정책과 교리가 있으면 바로 잡아나가고, 사도 바울이 제자를 보내 이방인을 전도했듯이 JMS도 세력화하지 말고 흩어져 나눔과 섬김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하여야 할 것이다. 로마서 3장을 보면서 동의할 수밖에 없는것은 사람은 거짓된 자이고 오직 하나님은 참되다라는 말씀이다. 문선명이든 정총재이든 결국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의 역사다.
정명석 씨 출국에서 JMS분열까지
지난 1월 7일, JMS 이탈 신도인 황모 씨 납치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정명석 씨는 1월 말로 예정된 유럽순방을 앞당겨 사건 다음날인 8일 자신의 수행비서인 동생정용석 씨와 몇몇 여신도를 대동하고 황급히 출국하였다.
같은 달 9일에는 정 씨의 맏형인 정인석 목사를 비롯한 형제 전원과 미국유학 중에 일시 귀국하여 순회강연을 하고 있던 전 부총재 안구현 씨, JMS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향후 방향에 대해서 논의하고 그동안 월명동을실질적으로 운영해온 정 씨의 동생 정범석 씨와 안구현 씨를 대표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또한 정 씨의 맏형인 정인석 목사도 “동생의 일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개혁이올바로 되게하기 위하여 지도와 자문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정 목사와 안 씨가 JMS 개혁 방향의 가닥을 잡아갈 즈음 SBS에서 JMS의 실체를폭로한다는 소식을 접한 정범석 씨는 관계기관의 내사를 우려해 3월 13일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이 와중에 정인석 목사는 본격적인 개혁작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JMS 운영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3월 20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영 후존립자체에 위기를 느낀 JMS 측은 SBS를 상대로 반론보도를 청구하고 명예훼손혐의로 고소를 하여 동요하는 신도들을 진정시켰다. “신도들은 자신들의 이성교제까지 엄격히 금하는 상황에서 설마 정 총재가 그럴 리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안 씨의 한 측근은 분신하겠다는 열렬 신도들을 달래느라 혼이 났다고 한다.
이후 안구현 씨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뉴욕에 체류하고 있는 정 씨를 찾아가 개혁의 필요성을 호소했는데 이 자리에서 정 씨로부터 “나는 이제 죽은 것이나다름없으며 국내의 일에는 관여 안하겠다”는 언질과 함께 JMS의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안 씨측과 정인석 목사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정 목사가형인 자신을 따르라는 메시지를 정 씨가 신도들에게 보냈고 전권을 위임했다고나섬으로써 JMS 내에는 이상기류가 형성되었다.
급기야 정 목사가 4월 올림픽공원 내 체조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자신이 JMS에들어와 개혁을 직접 주관하겠다고 공표하면서 JMS 내의 개혁 세력이 양분화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 씨 형제와 안구현 씨 측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데 양측 모두 나름대로 강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정 목사 측에서는 비록 정 씨가 안구현 씨에게 전권을 위임하였다고는 하지만 안씨가 공식적으로 JMS 일에서 손을 뗀 뒤 80년대 중반 JMS에 들어온 정 씨의 동생 정범석 씨가 월명동에서 실질적인 운영을 도맡다시피 하였다는 점을 들고 나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정범석 씨를 추종하는 세력이 형성되어 힘이 많이 분산된 상황에서 정 목사는 동생 4명이 관련된 일이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입장으로 보이는데 신도들도 자신들이 구세주로 생각하는 정 씨의 형인지라자연히 정 목사를 추종하는 편에 서게 되었다.
성교회 목회자 신분으로 이단단체의 문제에 뛰어든데 대한 교계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기성교회의 목회자로서 동생의 일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고 JMS의개혁에 앞장선 것이지 단지 동생만을 위해서는 아니다”라고 강하게 항변하는 정인석 목사는 JMS의 개혁은 교단에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외부인이 맡아야 적격이지만 독특하게 형성된 문화때문에 쉽지 않은데, 자신은 외부인이면서 정 씨의친형이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안 씨측의 한 측근은 정 목사가 오늘의 책임이 안구현 씨측에도있다고 보는 것은 탓할 수 없으나 정 목사가 추진하고 있는 방향은 그의 형제들을위한 것이기 때문에 동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국내에서 미묘한 힘 대결이벌어지고 있는 사이 정 씨는 해외에서 매일 팩스와 전화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며신도들을 조종하였다. 아직도 정 씨를 구세주로 믿는 많은 신도들은 개혁을 주창한다는 명분으로 지금껏 금기시되어왔던 정 총재에 대한 불만을 서슴없이 토로하는 안 씨측을 성토하는 상황에까지 왔다.
5월 이후 정 목사는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교단갱신과 설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교단 곳곳의 주요 자리에 포진해 있던 안 씨의 측근들을 몰아내 안 씨측의불만을 사기에 이르렀다. JMS 내에서 정 목사측과 안 씨측과의 미묘한 알력이 형성된 가운데 본격적으로 내분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류는 정 씨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판하는 초창기 멤버들과 아직도 정 씨를 열렬히 추종자하는 신도들 사이로 퍼져 더욱 확산되는 분위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안 씨측은 기자회견을 통해 개혁의 방향을 천명하기로 하는한편 정 씨에게 성을 유린당한 피해자 규합에 나섰다. 그러나 피해자가 전부 여성인지라 신변문제를 우려해 직접적으로 나서는 것을 꺼리는 상황에서 피해자 규합에 나섰던 박모 씨가 몇 명의 피해자 명단을 입수해 정 목사에게는 무마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안 씨에게는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거액의 금품을 요구한 일이 드러나 기자회견은 무산되고 말았다.
정 목사와 안 씨를 비롯한 JMS일선 교회 교역자들 사이에 개혁방향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상태에서 개혁의 가닥을 잡지못한 채 내부 분열로만 비화되던 지난 달,정 목사와 안 씨는 SBS의 7월 24일 2차방송을 앞두고 더이상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개혁이 안된다는데 입장을 같이 하고 일간지에 사과문을 게재하기로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또한 서로의 입장차가 너무 커 사전 동의 없이 중간에 성명서 내용이바뀌는 등 불신의 골만 더욱 깊어졌다.
한편으로 지난 달 22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JMS의 “사회와 한국교회에 드리는글” 제하의 광고에서는 가장 문제가 되는 정 씨의 성추문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는 등 개혁을 향한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는 게 교계의 중론이다. 잘못된 과거에대해 철저히 회개하고 책임질 것은 마땅히 책임을 다한 후에 ‘교단 설립’ 운운하는것이 순서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마침내 지난 지난 말 안구현 씨측은 ‘국제크리스챤연합개혁위원회’를 결성하고,자신들의 교리인 30개론의 뿌리가 통일교의 원리강론임을 자인하고 한국교회의지도 아래 바르게 고쳐나갈 것이라며 정명석 씨가 JMS와 관련된 모든 직에서 물러남과 더불어 정 씨의 모든 친인척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정인석 목사와 결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정 목사는 정 목사대로 오는 15일 새로운 교단 창립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니 지켜볼 일이다.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든 갱신을 하든 개혁을 하든 정 목사나 안 씨의 서로 다른주장에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 씨 본인이 도피행각을 끝내고 돌아와 한국교회와 피해자들 앞에 솔직히 죄를 고백하고 응분의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
현재 대부분 미혼여성인 피해자들이 고소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 씨에 대한 검찰 수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 씨가 ‘친고죄’의 맹점을 악용해 기독교를 더이상 우롱하지 못하도록 JMS 전반에 대한 사법당국의 과감한 수사 착수를 촉구하며, 정 씨 또한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하루 빨리 돌아와 하나님의 심판을받기를 바란다.
아직도 정 씨 우상화 놀음에서 헤어나지 못한 JMS 청년대학생들의 영육은 누가책임지고 보살필 것인가.
<특별취재반>
월간 현재 종교 1999년 8원호
P3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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